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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김정주 교수] “사랑으로 가난보듬은 어머니가 신앙교본” 2008.08.03

출처: 국민일보



[국민일보/ 10월 16일]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김정주 교수] “사랑으로 가난보듬은 어머니가 신앙교본” - (p. 33)

“이 믿음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에 선한 본이 되어준 분을 그의 외조모와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은혜로 내 신앙에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가장 아름다운 영향을 끼쳐 주셨다. 외할머니 최성년 권사님은 1907년 평양 대부흥회 때 은혜 받은 성도들이 귀향하여 전도하던 무렵 예수님을 영접하고 대구 남산교회에 나가시면서 평생 주님께 헌신하셨다. 40세에 성경학교에서 한글과 성경을 함께 공부하시고 졸업 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셨는데 성경을 거의 모두 외우셔서 성경을 보지 않고 3∼4시간을 가르치셨다. 늘 철야·새벽기도를 하시며 여생을 영육이 가난한 시골 목회에 바치셨다.

나의 어머니 여귀옥 권사님은 모태신앙으로 13세 때 주님 말씀을 위해 순교하겠다고 헌신하셨다. 평양여자신학교에 다니실 때 순교자 토머스 목사님 기념교회에 첫 소풍을 가셔서 느끼신 감동을 늘 기억하셨다. 신학교 시절 주일 오전에는 주기철 목사님의 산정현교회에서 교회학교 사역을 하셨고 오후에는 길선주 목사님의 장대현교회 성가대로 봉사하셨다.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학교가 폐교당했을 때 순교 대열에 서지 못한 것을 어머니는 가장 안타까워하셨다.

결혼 후 6·25전쟁 직후 하루는 집에 도둑이 들어 옷가지를 모두 훔쳐갔다. 그날 새벽 어머니는 자녀들을 모아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인데 밤새 다 가져가게 하심은 불쌍한 우리 민족을 도우라고 우리를 부르시기 위함이다. 이 불쌍한 민족을 누가 도울까”라고 물으셨다. “우리가요”라고 어린 우리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지난밤 우리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구나”하시며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6·25전쟁 직후 일부 고아들이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고 밤에 도둑질하며 다리 밑에서 잤다.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에 들어가신 어머니는 회관을 사서 고아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시작하셨다. 동시에 절제운동을 통해 술과 담배,마약의 해독을 계몽하여 개인과 가정,국가가 파괴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에 힘쓰셨다. 순교를 각오하신 어머니의 기도는 항상 일정했다. “하나님 아버지,제 피를 다 흘려 이 땅의 교도소가 비고 흰 깃발이 날리게 된다면 기쁘게 죽겠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독서에 푹 빠져 공부를 못해도 어머니는 꾸중을 않으셨다. 오히려 “잘했다. 모르는 것을 알면 됐다. 틀린 것이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만 말씀하셨다. 또 “정주야,나는 네가 장차 하버드대에 가면 좋겠구나”라고 격려하셨다. “하버드가 얼마나 어려운 학교인데요”라고 대꾸하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했다.

아버지 사업 때문에 중2 때 서울로 전학왔다.

이화여중의 수학 진도가 빨랐던 탓에 나는 한동안 낙제점수를 받았다.

어머니는 우리 공부는 주님께 맡기시고 사창가에 팔려가는 불쌍한 처녀들을 수용할 장소 마련을 위해 밤새 기도하시면서 그 일을 맡으셨다. 친구들은 과외를 하는데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하루 계획표를 짰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후 5시쯤 됐다. 나는 6시쯤 저녁식사를 하고 바로 잠을 잔 뒤 밤 12시에 일어나 새벽까지 공부했는데 중3 모의고사 때부터 이화여대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주님 나라와 주님의 의를 먼저 구하신 어머니의 삶이 교훈이 되었다(마 6:33).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나는 회개 없이는 하나님께 한 발짝도 갈 수 없는,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교 4학년 때 눈물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내가 확신하게 해주셨다.

어머니 축복대로 1989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마서 8장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이해’란 논문을 쓰면서 로마서 8장을 늘 외우셨던 외할머니처럼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미국 타임지는 한국 교회의 부흥을 기복신앙 때문이라고 혹평했다.

그때 외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국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순교 신앙에 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의 순교 신앙의 은혜를 영어로 번역,출판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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