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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민일보] “크리스천 리더들 힘 모아 평신도 부흥 기폭제 역할하겠다” 2019.04.02

출처: 국민일보



[국민일보 - 2019년 4월 2일]

 

 

[나와 예수-김영훈]

 

“크리스천 리더들 힘 모아 평신도 부흥 기폭제 역할하겠다”

 

 

 

 

경영인으로서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의 꿈은 대성그룹을 토털 에너지 솔루션 프로바이더(Total Energy Solution Provider)로 키우는 것이다. 그는 지난 25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성그룹이 앞으로 새로운 에너지원에서 촉발된 혁신적인 경제혁명의 주체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일흔이 다 된 노신사는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중간중간 눈물을 훔쳤다. 슬픔에 북받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지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마음을 돌렸다는 얘기와 부인이 둘째 환희(태명)를 유산해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냈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랬다. 집무실 탁자에는 성경책이 놓여있고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Skype)의 한국 운영사답게 화상회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노신사는 인터뷰 내내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 지난 2월 21일 출범한 국민일보 크리스천리더스포럼 회장을 맡은 김영훈(67) 대성그룹 회장을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대성그룹 사옥에서 만났다.

 

먼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경제학을 전공하다 신학대학원으로 옮긴 이유가 궁금했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좋았다. 그러면서 원어로 성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하버드대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원서강연이 탁월했다. 여기에 매료됐고 말씀을 깊이 알고 싶어 신학과 교회사를 공부하게 됐다.”

 

하버드대에는 오래된 장로교회가 있었다. 김 회장은 여기에서 목회를 하며 전도사로 있었다. 그러다 나이가 드신 아버지(김수근 창업주)가 회사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도 “기업인은 성직이다. 기업 자체가 일터가 될 수 있다”며 특수선교한다는 생각으로 기업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특수선교라고 하면 낮은 사람이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선교를 생각하는데 특권이 너무 많아서 현실과 괴리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 기이하게 느껴지는 게 전도사로 있으면서 설교를 준비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간증이나 말씀 등 이것저것 찾고 준비할 게 많았는데 기업에 돌아오고 나니 간증할 거리가 많아졌다. 다시 목회를 하게 된다면 정말 즐겁게 목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등 일부 과학자들의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믿음이 약한 이들을 미혹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태신앙인 그는 삶의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총과 기이한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한 번도 신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실험할 수 있을까. 내가 우리 부모의 자녀라는 것을 누가 확인해줄 수 있는가. 결국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어떤 분인가는 체험을 통해, 실증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과학은 하나의 가설이 다른 하나의 가설과 충돌할 때 해결할 길이 없다. 과학은 하나님에 대해, 자연에 대해 한계가 있는데 내가 증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틀렸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격적인 존재로 오시고 부활하신 게 증거다.”

 

대성그룹의 72년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는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이 오늘날의 대성그룹을 있게 했다고 단언한다. 석탄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1947년 5월 10일 대성산업공사를 창업했다. 김 회장 부모는 대구 남산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연탄사업이 잘 되면서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찾고 있었는데 같은 교회 다니던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흑판(칠판)을 만들었다. 6•25전쟁이 터진 뒤 부산에 피난 갔다오니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다. 창고 안에 남은 것은 칠판뿐이었다. 경북도교육청을 지나는데 ‘칠판 구함’이란 글자가 써있었다. 북한군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학교에 주둔하고 책상, 걸상, 칠판을 다 불쏘시개로 쓰다보니 남은 게 하나도 없었던 것. 전쟁이 끝난 뒤 천막 치고 칠판만 걸어놓고 공부를 가르치다보니 칠판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것이 대성그룹의 시드머니(종잣돈)가 됐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군사정부는 산림녹화를 해야 한다며 입산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다보니 연탄 수요가 급증했다. 대성은 연탄 사업만으로 당시 한국 10대 기업에 올랐다.
외환위기 때도 마찬가지다. 김영삼정권 말 경제가 위태로운데 정부는 대증요법만 쓰고 있어서 불안했다고 한다. 당시 김 회장이 기획조정실장(상무)으로 있을 때였다. 직원들을 모아놓고 “나라가 위험하니 나라가 뒤집어지더라도 우리 그룹은 순항할 수 있게 준비하자”고 했다. 당시 대부분 기업들이 단자사에서 자금을 빌려쓰고 있었는데 단자를 없애고 매칭펀드로 바꿨다. 연탄산업 특성상 겨울에 돈이 남아돌고 여름에 부족한데 겨울에 남는 돈을 금융기관에 연 10%로 빌려주고 여름에는 11%로 빌리기로 한 것. 외국계은행들이 매칭펀드에 응했다. 한 달 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대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졌고 재계 50위였던 대성그룹은 순식간에 10위가 됐다. 롯데, 태광과 함께 IMF 삼총사로 불렸다.

 

“전쟁과 외환위기 때가 우리 그룹으로선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전쟁 한복판에서 나라 전체가 불구덩이에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복을 주신다. 시편 17편 7~8절 다윗이 쓴 시처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너무 절실하게 느꼈다.”

 

김 회장은 부활이 먼저냐, 영생이 먼저냐고 물었다. 나는 부활이 먼저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은 잠드는 거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가치 있고 새롭고 복된 삶이 영생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죽고 나서 영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순간 살아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고 했다.

 

(중략)

 

국민일보 크리스천리더스포럼은 각계의 크리스천들이 모여 간증과 강연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모임이다. 포럼 회장을 맡은 그는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남강 이승훈 같은 겨레의 스승들의 공통점은 독실한 크리스천 리더들이었다”며 “크리스천 리더들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 민족의 빛과 소금이 돼 각자 제 살 길을 찾아 헤매는 이 세대를 주께로 돌이켜 참된 화해와 통합을 이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가 원하는 크리스천리더스포럼 모습은 로열 프리스트(Royal Priest)다. “장로님들이 많이 참석하시는데 크리스천리더스포럼이 성경에 나오는 로열 프리스트, 즉 왕 같은 제사장의 모임이 됐으면 한다.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과 요셉, 노아의 모습이 크리스천의 원형이다. 예수님도 다윗의 자손이니까 왕이면서 평신도였다. 기독교의 핵심은 평신도인데 언제부터인가 가톨릭과 비슷하게 목회자 중심으로 가고 있다. 포럼 회원들이 이 모임에 와서 간증을 통해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서로 나누고 힘을 얻어 사회에 나가 로열 프리스트로 살아갔으면 한다. 그래서 포럼이 평신도 부흥운동의 기폭제, 촉매가 됐으면 좋겠다.”

 

김수근 창업주의 4남3녀 중 3남인 김 회장은 여동생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과 함께 스위스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에 2003년부터 17년째 출석하고 있다. 소탈한 두 남매는 다보스포럼에 참석할 때도 호텔 대신 현지 집을 임대해 이용한다. 백팩 둘러메고 관심 있는 세션을 찾아다니는 대기업 회장은 인공지능(AI), 생명공학, 영화 등 다방면으로 조예가 깊다. 만나는 지인들도 세대를 뛰어넘어 40대 창투사 대표, 영화제작자, 이공계 교수, 정신과 전문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차녀인 김정윤씨와 41세에 결혼한 김 회장은 1남3녀를 두고 있다.

 

이명희 종교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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